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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맛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어느덧 일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보고 싶지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책의 맛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자이자, 작가이자,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위원인 로제 그리니에의 <책의 맛>이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1919년 프랑스 캉에서 태어났으니 금년에는 100수가 되는데, <책의 맛>이 출간된 것은 2011년이나 90세를 넘긴 나이에 쓴 것이었습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나이에도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숱한 책들이나 그밖에 자료들의 핵심 주제는 물론 내용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고를 쓰는 일이 대단한 체력을 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는 청년작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지력과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여쭙고 싶어졌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홉 가지 주제, 다시 말해서 글쓰기와 책에 대하여 아홉 가지의 시각에서 이야기합니다. 옮긴이가 요약한 내용을 옮겨보겠습니다. “미디어를 점령한 사회뉴스와 문학의 관계를 짚어보고, 여러 문학작품이 그리는 기다림에 주목하며 글쓰기가 시간과 맺는 관계도 살핀다. 그리고 자기모순에 빠질 권리와 떠날(죽을) 권리에 대해,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 성찰하고, 기억과 소설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문학의 해묵은 주제인 사랑도 빠뜨리지 않고, 작가들에게 미완성작품과 마지막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피고, 글을 쓰는 이유와 글을 쓰려는 욕구에 대해서도 성찰한다.(226쪽)”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위원을 오래 지낸 만큼 세계적인 문호들과의 개인적인 교류뿐 아니라 그들에 관한 뒷이야기까지도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갈리마르에서 출간한 책들은 대부분 읽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책들의 대부분은 갈리마르의 것이기도 합니다. 옮긴이는 ‘이 노작가의 해박함은 위압적이지 않다. 그의 문체는 과시적이지 않고 소박하며 섬세하고 깊이가 있다’라고 적었습니다만, 책을 읽는 동안 참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관심을 두고 있던, 기억과 망각,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에 대한 생각을 보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진짜 주제는 “세상에 대한 철학적 비전을, 감정적 시간의 경험을, 그리고 자신의 천직을 찾는 인간의 모험을 표현한 것이다.(129쪽)”라고 적은 부분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읽었을 때는 ‘시간의 층위 속에 묻혀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의 소환’에 무게를 두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 자신이 작가로 발전해가는 과정, 즉 할머니의 지원을 바탕으로 책읽기가 몸에 배었던 것이나 부모의 후광으로 유명작가와의 만남 등이 이어졌던 것이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다만 세상에 대한 철학적 비전 부분은 책읽기의 역량이 부족했던지 윤곽을 그려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달에 종영한 드라마,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과도 연관이 있습니다만, 그라나다 지방에 전해오는 마법과 같은 이야기를 소재로 한 <사라고사에서 발견된 원고>에 관한 이야기를 미완성 작품이라는 주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마녀가 쳐놓은 덫에 걸린 주인공은 결국 묘지의 교수대 아래서 마법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이 책의 서문을 쓴 로제 카이유아는 그 상황에 대하여 ‘마치 저주의 거울이 끝없이 비추듯이’라고 적었던 것입니다. 드라마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의 끝 장면을 두고 작가는 판타지 드라마라는 점을 고려했다는 설명이지만, 게임의 특성을 고려해서라도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별해서 마무리를 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
전후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는 로제 그르니에의 문학 탐사

여기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역사, 로제 그르니에가 바라보는 문학의 세계가 있다. 프루스트·플로베르·나보코프·플래너리 오코너·체호프·보들레르·카프카가 저자의 친구 및 동료 들인 로맹 가리·장 폴 사르트르·클로드 루아, 그리고 멘토인 알베르 카뮈와 함께 행복하게 거니는 곳이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편집자 겸 작가로 활동하며 프랑스 문학의 면모를 일궈낸 로제 그르니에는 그만의 비평방법으로 문학을, 작가들을 보면서 삶의 의미들을 밝혀낸다. 사람들은 왜 쓸 필요를 느낄까? 기다리는 행위는 왜 그토록 문학의 중심적인 테마일까? 작가들은 마지막 문장을 막 썼을 때 알까? 아니면 늘 다른 누군가가 판정하는 것일까? 가장 깊은 자아를 문학 텍스트에 담는 것과 사생활을 드러내는 것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은 총 아홉 개의 에세이로 이루어져있다. 각각의 에세이들은 모두 하나의 문제 또는 테마로 시작되어 문학적인 자유연상을 가장한 일종의 논쟁 형태로 탐험된다. 그르니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소설과 에세이들로부터 지혜와 유머를 끌어낸다. 그의 펜 아래 줄지어 불려 나오는 어마어마한 저자와 작품의 무게만으로 충분히 묵직한 책이지만, 소박하고 섬세하고 깊이 있는 노작가의 해박함은 우리로 하여금 즐겁게 ‘책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시인들의 나라’ 9
기다림과 영원 33
떠나다 61
사생활 89
사랑에 대해 쓴다, 여전히… 125
치과에서 보낸 반시간 137
미완성작 149
나에게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을까? 169
사랑받기 위해 193
옮긴이의 말 224